이제 '사회 정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정의로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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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07-30 05:43 조회414회 댓글1건본문
이제 ‘사회 정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정의로 바꿀 때다
Helen Louise Herndon, 2024. 07. 25 (김행범 옮김)
사회 정의가 역설임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의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정직하게 적용할 때 진정하고도 참된 정의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진정한 정의는 평등성(equality), 공정성(fairness), 정직성(fairness), 불편부당성(impartiality), 그리고 편견 없고(nonprejudicial), 인종적이지 않고(nonracial)이며, 선별적이지 않고(nonselective), 객관적(nonselective)이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단일의 표준(single standard)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 정의”를 명백히 반영하는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사회 정의”를 정의하거나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단어의 원래 의미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교묘하게 반영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 정의”를 정의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다양성(diversity), 포용성(inclusion), 형평성(equity)이다.
잘 알려진대로, 사회 정의를 묘사하는 이 단어들은 많은 사람에게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제대로 바로잡혀진다면 말이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건 어떤 집단의 사람도 소외되거나, 배제되거나, 그리고 편견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일부 집단에 대해 가해진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다른 집단에 불의를 조성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양성(diversity)과 관련해 볼 때, 인종(race)과 성별(gender)은 정의롭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선정 요건이 평등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이 관련된 몇몇 상황에서는 인종이나 성별에 토대하여 특혜가 주어진다. 객관적인 자격 요건이 무시되어, 일부에게 편파적이고, 편견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선별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리고 불평등한 특혜 조치가 주어진다. 거기에는 아시아계나 백인보다 흑인을, 남성보다 여성을 우대함같이, 한 인종을 다른 인종보다 우대하는 것이 포함된다. 젠더 문제에는 성적 지향도 포함될 수 있다.
포용성(inclusion)과 관련해서는, 몇몇 조직, 클럽 또는 기숙사에는 “안전한 공간(safe space)”이라는 필요하지도 않고 이름도 좋지 않은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이는 신체적 보호나 안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인종처럼 자기 방종적(self-indulgent)인 심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은 사실상 배제(exclusion)와 차별(segregation)을 조장한다. 이는 자신의 인종 집단과만 어울리는 행동과 공간을 만들고 분열과 인종 차별을 조장한다.
다음으로, 형평성(equity)이라는 용어가 어디에나 존재한다. 겉으로만 보고, 우리는 형평성이 평등성(equality)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의도된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에서도 평등은 무시된다.
미국의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루포(Christopher F. Rufo)가 인용한 것보다 이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다: "형평성이 요구하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즉, 형평성은 개인을 집단 정체성에 따라 분류하고는 그 집단 구성원들을 다르게 대우하며, 불의한 결과로 여겨질 수도 있었던 것을 “평등화(equalize)”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은 우대를 받고 다른 집단의 구성원은 불이익을 받는 것인데, 요컨대 “형평성(equity)”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불평등(inequality)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오래된 불의를 바로잡는 수단이라며 새로운 불의를 만드는 것은 우수함(excellence)의 기준을 낮추고 무고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피해를 주어 우대받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정의의 목적은 무고한 사람들을 악이나 부당한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는 자격 없는 심지어 사람조차 포함해 일부 사람만을 보호하는 반면에, 죄 없고, 무해하고, 자격을 아주 잘 갖춘 우수한 개인에게는 피해를 준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단일 기준이라는 것이 제거되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불의들은 기본적으로 단일 기준이 아니라 이중적 기준들의 전형이다.
평등, 공정, 정직, 공평, 편견 없고, 인종적이지 않고, 선별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모두에 관한 단일 기준을 갖는 것과 같이 진정한 정의가 요구하는 것들로 돌아가라. 이 목록 중 불공정 혹은 불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 그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다양성, 완전한 포용성, 그리고 조건 없는 형평성을 보장하지 않는가?
“진정한 정의(true justice)”에 관련해, 우리가 목표로 삼고 추구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옳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지, 이전에 어떤 사람들에게 가해진 실수와 불의를 반복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사람을 위해 지금 실시되고 있는 “사회 정의”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정직하고도 “진정한 정의”로 바꾸어야 할 때이다!
글쓴이) Helen Louise Herndon
헬렌 루이제 헌던은 미국의 메이저급 신문 및 여러 기독교 출판물에 기고하는 프리랜서이다. Columbia Bible College(현 Columbia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졸업 후 프랑스와 튀니지에 거주하면서 북아프리카 복음 선교사로 사역했다. 헌던은 과거 미제스 와이어(2024.03.02) 기고에서 아프리카인과 전쟁을 벌인 것은 유럽인이기보다는 주로 아프리카인이었고, 그 승자는 패배한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았으며, 승자 아프리카인들은 패배한 아프리카 전사들을 유럽인에게 팔아넘긴 흑역사를 밝힌 바 있다.
옮긴이) 김행범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원문) https://mises.org/mises-wire/time-reject-social-justice-and-replace-it-real-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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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도헌님의 댓글
김도헌 작성일
정의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1.정의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가져오는 일이다.
2.선인선과는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선한 과보를 가져다 주고 악인악과는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악한 과보를 가져다주는 일이다.
3.사회정의는 신기루에 가깝다.이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가 한 주장이다.
4.이 주장으로 하이에크는 큰 고초를 겪었다.
5.사회정의는 신기루라는 주장을 쓴 하이에크는 영국과 미국에서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대학으로 쫒겨났다.
6.사회정의는 정의와는 상관이없는 말이다.
7.누가 사회정의를 판결하고 심판할 것인가?
8.그 사회정의를 결과적으로만 판단하고 과정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아무말도 못한다.
9.이는 정의에서 보듯이 선한 사람이 악한 결과를 겪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선한 결과를 겪기도 한다.
10.이번생만 보고서 모든 것을 판단할때에 나오는 그릇된 결과이다.
11.그러나 전생에 지은것과. 현생에 지은 과보와 복덕을 판단하고 그 과정들을 이해할때에 정의는 완벽히 작동함을 본다.
12.사회정의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정의를 표방하지만 왜 그사람이 부자가 되는 과정을 겪었는지 왜 가난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의 검토가 없이 오직 결과적으로만 된 어떤 사실에 대해서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고 보고 이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사회정의는 신기루이며 정의에 어긋난다.
김도헌 올림